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 상공. 인류 최초의 실전 원자폭탄은 도시 전체를 초고온의 화구 속으로 몰아넣었다. 수천 ℃를 넘는 열과 초강력 충격파는 생명체는 물론 건물과 금속, 유리, 토양까지 순식간에 날려버렸다. 80여 년이 지난 지금, 과학자들은 그 극한의 순간이 남긴 또 다른 흔적에 주목하고 있다.
최근 과학자들은 참혹한 사건 흔적에서 뜻밖의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핵폭발은 모든 것을 파괴했을 뿐 아니라, 인간이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새로운 물질까지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원폭은 의도하지 않은 거대한 재료 실험실로 작용했다.
이탈리아 피렌체대학교 지질학자 루카 빈디 교수 연구팀은 지난달 30일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시스에 조사 보고서 '히로시마 원폭으로 생성된 다성분 합금의 발견(Discovery of a multicomponent alloy forged by the Hiroshima atomic blast)'을 내고 일본 히로시마만 해변의 모래 속 미세 입자에 지금껏 보고되지 않은 새 다성분 합금이 들었다고 전했다.
연구팀은 이 물질이 원자폭탄 폭발 당시 형성된 히로시마이트(hiroshimaite) 내부에 보존돼 있었다고 결론 내렸다. 해당 합금은 철과 크롬, 니켈, 망간, 몰리브덴, 알루미늄, 규소 등이 독특한 비율로 결합한 결정 구조를 보였다. 각 원소는 흔하지만, 이 같은 조합과 원자 배열은 자연에서도, 지금까지 알려진 산업용 합금에서도 확인된 적이 없다고 연구팀은 강조했다.
왜 이런 물질이 생겼을까. 연구팀은 답을 핵폭발이 만들어낸 극한 환경에서 찾았다. 폭탄이 공중에서 터지는 순간 화구의 온도는 7000℃를 훌쩍 넘었다. 강철과 콘크리트, 유리, 토양, 물까지 거의 모든 물질이 증발하거나 플라스마 상태로 변했고, 도시 전체가 거대한 원소 혼합 용광로가 됐다.
이후 화구가 급격히 팽창하면서 수 초도 되지 않아 온도가 급락했다. 뒤섞인 원소들은 원래 상태로 돌아갈 틈도 없이 새로운 배열로 굳어졌다. 연구팀은 이러한 초고온과 초고속 냉각이 이전에 존재하지 않던 결정 구조를 만든 원인이라고 추측했다.
흥미로운 점은 과학자들이 이 같은 환경을 핵폭발에서만 찾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행성에 거대한 운석이 충돌할 때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다. 번개가 모래를 녹여 유리질 암석인 섬전암을 만들고, 초고속 충돌 실험에서도 짧은 순간 평소에는 형성되지 않는 광물과 합금이 탄생한다. 연구팀은 히로시마 원폭 역시 이러한 극한 물질 생성 환경의 하나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연구팀은 올해 또 다른 실험에서도 비슷한 결론을 내놓았다. 미국 뉴멕시코주에서 실시된 인류 최초의 핵실험 트리니티 현장의 잔해에서 새로운 결정 구조를 확인한 것이다. 이 연구는 핵폭발이 단순히 기존 물질을 녹이거나 부수는 데 그치지 않고, 완전히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낼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
일련의 연구들은 핵폭발을 과학적으로 미화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학자들은 극한 환경에서 원자가 어떤 방식으로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지 이해하려 한다. 이런 메커니즘을 규명하면 초내열 합금이나 차세대 고성능 금속 개발의 힌트를 얻을지 모른다. 핵 감식 분야에서 과거 핵폭발 당시의 온도와 압력, 주변 환경을 재구성하는 단서로도 활용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연구팀은 원폭 잔해를 비평형 합금 형성과 새로운 물질 발견을 위한 자연 실험실이라고 표현했다. 파괴를 위해 만들어진 무기가 역설적으로 인류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물질을 만들어냈다는 의미를 담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박지연 기자 yeon@sputnik.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