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5000년 전 고대 이집트에서 여성이 파라오에 버금가는 지위를 가졌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새로운 연구 결과가 나왔다. 실물이 사라져버린 고대 유물의 낡은 흑백사진을 디지털 기술로 재분석한 결과다.

호주 매쿼리대학교 이집트학자 수전 켈리 박사 연구팀은 제1왕조 시대 왕족 여성 메르네이트의 정치적 지위를 재검토한 연구 결과를 학술지 Prague Egyptological Studies 9월 호에 냈다. 메르네이트는 약 5000년 전 이집트 제1왕조 제트 왕의 아내이자 훗날 파라오가 된 덴의 어머니다. 제트의 사후 어린 아들을 대신해 섭정하며 상당한 권력을 행사한 것으로 추측돼 왔다.

이집트 아비도스에 마련된 메르네이트의 무덤은 당대 남성 왕들의 것과 비슷한 규모와 구조를 갖췄다.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메르네이트가 단순한 왕비나 섭정을 넘어 실질적인 통치자였을 가능성을 오래전부터 제기했다. 다만 실제로 파라오의 지위에 올랐는지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는 부족했다.

고대 이집트 최초의 여성 파라오로 추측되는 메르네이트의 상상도 <사진=인공지능(챗GPT) 생성 이미지>

연구팀이 주목한 것은 1940년대 영국 이집트학자 월터 브라이언 에머리가 사카라에서 발굴한 진흙 마개들이다. 당시 항아리 등을 봉인하는 데 사용한 것으로, 일부의 표면에 파라오의 이름을 나타내는 세레크가 찍혔다. 세레크는 고대 이집트 왕권을 상징하는 중요한 표식이다. 에머리는 진흙 마개 하나에 찍힌 네 세레크 중 두 개가 메르네이트, 나머지 두 개가 그의 부친인 파라오 제르를 의미한다고 판단했다.

문제는 증거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발견된 진흙 마개 총 13점은 현재 행방을 알 수 없고, 촬영에 사용한 원본 유리건판까지 없어졌다. 남은 것은 에머리가 1954년 논문에 실은 화질이 떨어지는 흑백사진뿐이다. 사진 속 문자가 불분명해 그의 해석 역시 오랫동안 학계에서 논란이 됐다.

연구팀은 이 오래된 사진을 고해상도로 스캔한 뒤 대비를 조절하고 세레크 부분을 배경에서 분리했다. 이어 이미지를 반전하고 윤곽을 확대해 고대 문자의 형태를 다시 판독했다. 그 결과, 연구팀은 두 번째와 세 번째 세레크 안에서 메르네이트의 이름을 구성하는 흔적을 확인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약 70년 전 에머리가 내린 판독과 들어맞았다. 연구팀은 메르네이트가 남성 파라오와 마찬가지로 세레크를 사용했다면 단순히 어린 왕을 대신한 섭정으로만 보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고대 이집트 사회를 다스린 여성 파라오의 존재 여부에 대한 논란은 지금도 계속된다. <사진=인공지능(챗GPT) 생성 이미지>

아울러 연구팀은 메르네이트가 평생 동일한 지위에 있던 것이 아니라 정치 상황에 따라 역할이 달라졌을 가능성도 제시했다. 왕실의 유력 여성에서 공동 통치자로, 이후 어린 덴을 보좌하는 왕의 어머니이자 섭정으로 지위가 변화했다는 설명이다.

이 해석이 맞는다면, 고대 이집트 여성 통치자의 역사는 크게 앞당겨진다. 가장 유명한 여성 파라오 중 하나인 하트셉수트가 통치한 것은 약 3500년 전이다. 메르네이트가 같은 지위를 가졌다면 이보다 약 1500년 앞선 최초의 여성 파라오가 된다. 참고로 현재까지 고대 이집트의 여성 파라오로 확인되거나 유력하게 거론되는 인물은 소베크네페루, 하트셉수트, 네페르네페루아텐, 타우스레트 등이다. 이 가운데 가장 이른 소베크네페루도 메르네이트보다 1000년 이상 뒤의 인물이다.

물론 이번 연구로 메르네이트가 최초의 여성 파라오로 확정된 것은 아니다. 독일 훔볼트대학교 이집트사 연구자 에바마리아 엥겔 박사는 연구에 사용된 디지털 이미지를 검토한 뒤 다른 해석을 내놨다. 사진 속 세레크에서 메르네이트의 이름은 보이지 않으며 제르 왕의 이름만 확인된다는 것이다. 엥겔 역시 메르네이트가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고 어린 덴을 대신해 통치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지만, 이번 사진이 그의 왕위를 입증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섭정으로 추측돼 온 메르네이트가 실은 더욱 강한 권력을 가졌다는 주장은 많은 관심을 모았다. <사진=인공지능(챗GPT) 생성 이미지>

메르네이트를 둘러싼 논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수전 켈리 박사는 2019년 연구에서도 메르네이트와 제1왕조 초기의 또 다른 왕실 여성 네이트호테프가 세레크 등 남성 파라오와 같은 왕권 표식을 사용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당시 박사는 초기 왕조 시대에 오늘날처럼 섭정과 여왕을 명확하게 구분했는지 자체를 따져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수전 켈리 박사는 “5000여 년 전 사라진 왕의 자리를 둘러싼 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다만 실물조차 남지 않은 유물의 낡은 사진 한 장이 디지털 기술을 만나 고대 이집트 최초의 여성 통치자가 누구였는지 둘러싼 논쟁이 재점화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김한별 기자 khstar@sputnik.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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