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토끼(lagomorph)는 쥐 같은 설치류(rodents)와 흡사하지만, 몇 가지 면에서 두드러진 차이를 보인다. 그중 하나는 설치류는 가장 작은 아프리카피그미쥐(pygmy mouse)가 크기 3~8㎝, 무게 3~12g인 데 반해 가장 큰 카피바라(capybaras)는 1.1~1.3m, 35~66㎏이나 되는 등 다양한 크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반면 야생토끼는 수십㎏에 달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렇다면 야생토끼는 왜 말이나 소처럼 커지지 못한 걸까. 멍청하게 들릴 수도 있는 이 질문에는 사실 진화 과학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제가 담겨 있다.

<사진=pixabay>

이에 대해 일본 교토대학의 척추 고생물학자 수수무 토미야 교수 등 연구진이 최근 '진화' 저널을 통해 답을 내놓았다.

연구진은 가장 큰 야생토끼의 평균 무게가 5㎏에 불과하지만, 일부 집토끼와 멸종된 야생토끼는 무게가 8㎏까지 나갈 수 있다는 점에 착안, 무엇이 야생토끼들이 더 크게 진화하는 것을 막았는지 조사했다.

연구자들은 포유류의 화석 기록과 진화 역사를 살핀 것은 물론 야생토끼와 유제류(Ungulate)의 과거와 현재 크기 및 에너지 사용량 등을 분석했다. 유제류는 소나 말, 염소, 양과 같은 또는 발굽이 있는 포유류를 말하는 것으로, 이들의 존재는 야생토끼의 크기와 연관이 있을 수 있다는 가정이다.

그 결과 야생토끼가 약 6㎏에 도달하면 유제류와의 경쟁에서 불리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또한 북미의 화석 기록을 살펴본 결과 일정 지역에서 가장 작은 유제류가 가장 큰 야생토끼의 크기를 결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큰 야생토끼들은 같은 덩치의 유제류와의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기 어려웠다.

토미야 교수는 "이 결과는 야생토끼에는 유제류 경쟁자들에 따른 '진화적인 천장(evolutionary ceiling)'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생존 경쟁 말고도 다른 요인으로는 포식자의 위험이 증가하는 것도 꼽았다.

결국 야생토끼의 경우 크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다른 동물과의 경쟁이라는 밀이다. 이를 진화 이론에서는 '‘붉은 여왕 효과(Red Queen Effect)’이라고 부른다.

이 용어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쓴 영국 작가 루이스 캐럴의 후속작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 따온 말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붉은 여왕은 앨리스에게 "여기에서는 죽어라 뛰어야 같은 장소에 있을 수 있다"며 "다른 곳으로 가고 싶으면 두 배 이상 빨리 달려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스스로 빨리 변하지 않으면 다른 경쟁자들에게 뒤처진다는 의미로, 미국의 진화학자 리 밴 베이런이 도입한 용어다. 즉 생물의 진화는 종 사이의 경쟁이 중요하다는 이론이다.

앨리스와 달리는 붉은 여왕 <사진=John Tenniel>

토미야 교수는 "진화 생물학에서는 오랫동안 생물학적 요소와 환경적 요소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 논쟁이 벌어졌다"며 "화석을 통해서는 생물학적 경쟁을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에 한동안은 '궁정 광대 가설(Court Jester hypothesis)'이 더 힘을 얻었다"고 말했다.

궁정 광대 가설은 붉은 여왕 효과와는 달리 기후나 환경 같은 비생물적 요소에 진화의 초점을 맞춘 이론이다. 1999년 진화학자 안토니 바노스키가 자신의 논문에서 "진화는 붉은 여왕과 궁정 광대 둘 중 누구와 춤을 출 것인가"라고 표현하며, 생물적인 경쟁만큼이나 비생물적인 요소에 힘을 실으면서 잘 알려지게 됐다. 궁정 광대는 귀족과 심지어는 왕실까지도 비꼬며 웃음거리로 만들었던 역할을 했는데, 여기에서는 붉은 여왕을 조롱하는 듯한 의미가 담겨 있다.

두 이론은 언뜻 상반된 것으로 보이지만, 이제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해석하는 분위기다. 바노스키는 2001년 논문에서 "이제는 법원 광대가 붉은 여왕과 결혼할 때가 됐다"며 "이분법으로 두 가설을 나누기보다 연구를 계속하면 해결할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채유진 기자 eugene@sputnik.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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