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독제독. 독을 독으로 다스린다는 이 말은 통증 연구 분야에서 점점 현실이 되고 있다. 과학자들은 혀가 마비될 정도로 매운 천연 물질을 이용해 통증을 없애려는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고추의 매운맛 성분 캡사이신에서 출발한 이 연구는 이제 고추보다 수백~수천 배 더 강력한 물질로 확장됐고, 최근에는 말기 암 환자의 통증을 줄이는 임상시험 성과까지 냈다.
통증 연구의 출발점은 고추다. 매운맛을 내는 캡사이신은 피부나 점막의 TRPV1 수용체를 자극한다. 이는 원래 열과 화상을 감지하는 신경인데, 캡사이신이 여기에 달라붙으면 뇌는 실제 화상을 입은 것처럼 느낀다.
미국 신경과학자 마이클 카테리나 박사 연구팀은 1997년 낸 조사 보고서 ‘캡사이신 수용체: 통증 경로의 열 활성화 이온 채널(The capsaicin receptor: a heat-activated ion channel in the pain pathway)’에서 TRPV1 수용체의 역할을 규명했다. 연구팀은 매운맛과 통증이 같은 신경 경로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제시했고, 이 성과는 현대 통증 연구의 기반이 됐다.
이후 과학자들은 더 강한 매운 물질이라면 통증 신경을 더 효과적으로 꺼버릴 수 있지 않을까 주목했다. 그 결과 발견된 대표 물질이 레시니페라톡신(resiniferatoxin), 즉 RTX다. 모로코의 산악지대에 자라는 등대풀속 식물 백각기린의 진액에서 추출하는 독으로, 순수 캡사이신 대비 500~1000배 강한 자극을 일으킨다.
캡사이신 유사체를 대표하는 RTX는 1912년 고안된 매운맛의 기준 스코빌 척도(Scoville scale) 지수가 무려 약 160억 SHU다. 매운맛이 없는 피망은 0 SHU이고, 해외에서도 잘 팔리는 삼양식품의 불닭볶음면은 SHU가 4000대다. 타바스코소스에 쓰는 타바스코고추의 최대 스코빌 지수는 5만 SHU, 세계에서 가장 매운 고추 페퍼X는 약 300만 SHU다.
RTX의 원리는 단순하지만 극단적이다. 통증 신경의 TRPV1 수용체를 강하게 열어 칼슘 이온이 한꺼번에 밀려들게 만들고, 그 결과 통증 신호를 보내는 신경 말단이 사실상 기능을 잃게 된다. 일반 감각은 남겨두면서 통증만 선택적으로 약화하는 방식이다.
미국 국립보건원(NIH)은 2025년 RTX를 이용한 임상 연구 보고서 ‘난치성 암 통증에 대한 유력 치료법을 개척하는 NIH 학자들(NIH scientists pioneer promising treatment for intractable cancer pain)’을 냈다. 연구팀은 말기 암 환자 19명을 모집하고 척수액 주변에 RTX를 소량 주입했는데, 극심한 통증이 크게 줄었다. 환자들의 최고 통증 강도는 평균 38% 감소했고, 오피오이드 진통제 사용량도 57% 줄었다. NIH 연구팀은 RTX가 중독 위험 없이 장기간 통증을 억제할 가능성이 있어 새로운 계열의 비중독성 진통제의 미래를 보여준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NIH는 RTX를 삼차신경통, 신경 손상에 따른 통증, 수술 후 만성 통증 완화 연구에 확대할 계획이다.
최근의 RTX 연구는 매운맛으로 통증을 억제하는 수준에 머물지 않는다. 과학자들은 통증 신경만 골라 제거하거나 둔화하는 표적 치료를 목표로 한다. 기존 오피오이드 진통제가 뇌 전체를 억제하면서 중독과 호흡 저하 같은 부작용을 만들었다면, RTX 계열은 특정 통증 회로만 차단할 유력 물질로 기대된다.
RTX가 파괴하는 것은 통증을 전달하는 신경뿐이며, 촉각이나 온도 감각을 전달하는 신경, 손발을 움직이는 운동 신경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 현재 널리 사용되는 모르핀이나 펜타닐과 같은 오피오이드계 의료용 진통제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다만 RTX는 지나치게 강력해 용량 조절이 매우 중요하다. 학자들은 관련 연구에서 RTX를 극소량만 사용하며, 대부분 척수 주변이나 특정 신경 부위에 제한적으로 투여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맵냐가 아니라, 그 강렬한 자극을 어떻게 통증 치료로 전환하느냐다. 인류가 음식 속 향신료로 즐겨온 매운맛은 차세대 비마약성 진통제 개발의 열쇠로 주목을 받는 상황이다.
이윤서 기자 lys@sputnik.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