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비탈을 자세히 보면 누군가 일부러 깎은 듯한 계단이 이어지는 곳이 있다. 길고 좁은 평탄면과 짧은 단차가 등고선을 따라 반복돼, 멀리서는 거대한 층계처럼 보인다.

이런 지형을 테라세트(terracette)라고 부른다. 건조한 초원부터 고산 목초지까지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며, 소나 양이 오가는 곳에서는 소길 또는 양길로도 통한다. 문제는 이 계단을 정말 동물이 만들었는지, 흙이 중력에 의해 천천히 흘러내리면서 생긴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는 점이다. 과학자들은 100년 넘게 두 가능성을 놓고 논쟁을 벌였다.

테라세트는 각각 평평한 발판과 비스듬한 단차로 구성된다. 여러 개가 거의 평행하게 늘어서고, 짧은 경사로가 이웃한 계단을 연결하기도 한다. 모양이 지나치게 규칙적이어서 소와 양이 먹이를 찾아 제멋대로 움직인 결과라고 보기 어렵다는 반론이 오랫동안 제기됐다. 토양이 서서히 아래로 이동하는 토양 크리프나 사면 붕괴, 동결과 융해 같은 지질 작용이 더 유력한 원인으로 여겨졌다.

미국 조지아공과대학교 벤저민 셀렙 박사 연구팀은 초식동물의 이동과 토양 압밀을 결합한 컴퓨터 모델로 테라세트 형성 과정을 분석했다. 이를 담은 실험 보고서 ‘산을 움직이는 소: 방목 동물이 가파른 산비탈에 만든 테라세트(Moo-ving mountains: grazing agents drive terracette formation on steep hillslopes)’는 이달 초 영국 왕립학회 학술지에 소개됐는데, 테라세트의 정체를 밝힐 중요 자료로 평가됐다.

전형적인 테라세트 지형 <사진=인공지능(챗GPT) 생성 이미지>

연구팀은 가상의 산비탈에 소나 양처럼 풀을 뜯는 발굽동물을 배치했다. 동물은 무작정 걷지 않고 주변의 먹이와 이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비교해 다음 방향을 선택하도록 설정했다. 동물이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발굽은 흙을 누르고, 주변의 풀은 줄어들었다. 이렇게 달라진 지형과 먹이 분포는 다음 순간 동물의 이동 방향에 영향을 줬다.

실험 결과, 경사가 완만할 때 동물이 만든 길은 여러 방향으로 흩어졌다. 반면 경사가 급해질수록 위아래 이동에 드는 에너지 부담이 커지면서 동물은 비탈을 옆으로 가로지르는 방향을 선호했다. 반복된 발걸음은 등고선을 따라 비슷한 경로에 집중됐고, 결국 평행한 발판과 단차가 이어진 테라세트 지형이 생성됐다.

벤저민 셀렙 연구원은 “동물들이 서로 의논하거나 앞선 개체를 의도적으로 따라간 것은 아니었다”며 “각자 먹이를 찾고 힘을 아끼려 했을 뿐인데, 이전 발걸음이 남긴 흙과 식생의 변화가 다음 행동을 유도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한 개체가 환경에 남긴 흔적이 다른 개체나 자신의 다음 행동을 이끌어 규칙적 구조를 만드는 것을 스티그머지(stigmergy)라 한다”며 “개미가 앞선 개체의 화학물질 흔적을 따라 길을 만들거나, 사람들이 잔디밭을 반복해 가로질러 지름길을 만드는 것이 대표적”이라고 덧붙였다.

동물의 이동에 의해 테라세트가 형성됨을 보여주는 이미지 <사진=벤저민 셀렙>

연구팀은 경사가 가파르고 동물이 이동 에너지에 민감할수록 발자국의 방향성이 강하고 계단의 형태도 곧고 선명해지는  것을 확인했다. 실제 아프리카 오카방고 삼각주의 동물길과 중국 황토고원의 염소길,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의 소길에서도 경사가 클수록 길이 옆 방향으로 정렬되는 경향이 관찰됐다.

이번 실험에서는 테라세트마다 형성 원인이 다를 가능성도 제기됐다. 어떤 산비탈에서는 토양이 천천히 흘러내리는 지질 작용이 중심이 되고, 목초지의 경우 소와 양의 반복된 이동이 계단을 만들거나 이미 존재하던 단차를 더 뚜렷하게 한다고 연구팀은 결론 내렸다.

결론적으로 이번 연구는 무질서해 보이는 동물의 발걸음이 어떻게 규칙적인 지형으로 바뀔 수 있는지 보여준 점에서 의미가 있다. 소와 양이 산을 설계한 것은 아니지만, 먹이를 찾고 힘을 아끼려는 단순한 선택이 세월을 거치며 산의 표면을 바꿨을 가능성에 학계가 주목했다.

정이안 기자 anglee@sputnik.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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