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시대 유럽을 호령한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의 당주 프란체스코 1세 데 메디치의 죽음을 둘러싼 440년 묵은 미스터리가 풀렸다. 오랫동안 동생에 의한 독살설이 제기됐지만, 유골에서 치명적인 말라리아 원충의 DNA가 검출되면서 사인이 과학적으로 확인됐다.

미국 예일대학교와 이탈리아 피사대학교 공동 연구팀은 메디치 가문의 프란체스코 1세와 그의 동생 조반니 데 메디치의 유골에서 DNA를 추출해 분석한 결과를 17일 아이사이언스(iScience)에 발표했다. 연구팀은 피렌체 산 로렌초 성당 메디치 예배당에 안장된 두 사람의 갈비뼈에서 DNA를 추출해 병원체의 흔적을 조사, 정확한 사인을 알아냈다.

예일대 알렉산더 오초아 박사는 "둘의 DNA에서 극히 치명적인 열대열말라리아 원충의 유전자가 확인됐다"며 "특히 프란체스코 1세의 경우 사일열말라리아 원충도 함께 검출돼 두 말라리아에 동시 감염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메디치 가문 당주와 그 후계자의 유골 DNA 분석에서 말라리아 원충의 유전자가 검출됐다. <사진=아이사이언스>

프란체스코 1세 데 메디치와 아내 비앙카 카펠로는 1587년 토스카나 포조 아 카이아노 별장을 찾은 뒤 고열에 시달리다 차례로 숨졌다. 당시 동생이자 후계자 페르디난도 1세가 권력을 노리고 비소로 독살했다는 설이 퍼졌고, 2006년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다만 이번 유전자 분석을 통해 당시 궁정 의사들이 기록한 간헐적 고열 증상이 말라리아 탓일 가능성이 커졌다.

말라리아는 아프리카 풍토병으로 알려졌지만,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중부에서도 수세기 동안 유행했다. 당시 토스카나의 습지와 농촌에는 말라리아를 옮기는 얼룩날개모기가 많이 서식했고, 메디치 가문은 이런 지역의 별장을 자주 이용했다고 전해진다. 프란체스코 1세 데 메디치의 또 다른 동생 조반니 역시 1562년 토스카나 해안을 방문한 뒤 말라리아로 추정되는 질환으로 숨졌다.

말라리아 원충에 감염된 얼룩날개모기에 물려 전파되는 말라리아는 고열과 오한, 두통, 근육통이 반복된다. 열대열말라리아는 적혈구를 빠르게 파괴해 뇌와 신장 등 주요 장기에 치명적일 수 있다. 치료하지 않으면 수일 안에 사망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사인이 불명확했던 메디치 가문 당주 프란체스코 1세 데 메디치(왼쪽)와 성직자로 그를 섬긴 동생 조반니 데 메디치 <사진=인공지능(챗GPT) 생성 이미지>

이탈리아에서는 1970년대 말라리아가 사라졌지만, 아직 세계 각지에서 이 병으로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2024년 80개국에서 약 2억8200만 건의 말라리아 환자가 발생해 약 61만 명이 숨졌다. 서울에서도 2024년 말라리아 환자가 보고돼 보건당국이 긴장했다.

알렉산더 오초아 박사는 "조반니의 유골에서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열대열말라리아 원충의 유전자 변이도 확인돼, 말라리아가 유럽에서 어떻게 진화하고 확산했는지 추적할 새로운 단서를 제공했다"며 "고대 DNA 분석이 과거 인물의 사인을 밝히는 것을 넘어 병원체의 진화사까지 복원하는 정보로 활용된 사례"라고 언급했다.

이윤서 기자 lys@sputnik.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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