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과 삽화 분석으로 새 가설 제기
[편집자주]어떤 현상의 진상이 밝혀지면 과학, 그렇지 않으면 미스터리입니다. 거리가 멀 것 같은 과학과 미스터리가 실은 종이 한 장 차이로 상존하는 셈인데요. 스푸트니크가 발굴한 기묘한 미스터리와 아직 과학이 풀지 못한 기현상을 'SM(Sputnik Mystery)' 코너에서 다룹니다.
세계에서 가장 불가사의한 고문서로 꼽히는 보이니치 필사본(Voynich Manuscript)이 약 600년 동안 페이지가 뒤섞였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누구도 해독하지 못한 이 문서의 비밀이 글자뿐 아니라 책을 엮는 방식에도 숨어 있었다는 주장에 관심이 모였다.
몰타공화국 몰타대학교 콜린 레이필드 연구원과 미국 중세 필사본 전문가 리사 페이긴 데이비스 박사는 학술지 디지털 메디벌리스트 9월 호에 조사 보고서를 내고 보이니치 필사본이 처음부터 한 권의 책으로 제작되지 않았을 수 있다고 전했다.
15세기 초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보이니치 필사본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식물과 천체, 벌거벗은 여성들이 그려졌다. 본문 역시 알려진 언어와 다른 독특한 문자로 가득해 수백 년 동안 학자들이 해독하려 했지만 명확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연구팀이 주목한 것은 글의 의미보다 필사본의 물리적 구조다. 이들은 필사본이 원래 양피지 한 장씩을 반으로 접은 독립적인 소책자 형태였다고 봤다. 이후 제본 과정에서 양피지를 원래의 순서대로 배열하는 대신 여러 장을 겹쳐 한가운데를 묶으면서, 서로 이어져야 할 페이지가 멀리 떨어졌다는 게 연구팀의 생각이다.
가설을 확인하기 위해 연구팀은 문장들의 통계적 유사성을 분석했다. 그 결과 본래 같은 양피지에 속했던 페이지들은 현재 책에서 떨어져 있더라도 내용상 유사한 특징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삽화에서도 단서가 발견됐다. 필사본에는 물길이나 관처럼 생긴 구조가 페이지 경계까지 이어지는 그림이 있다. 현재의 페이지 배열에서는 이런 선들이 맞은편 그림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지만, 양피지의 원래 구조를 고려하면 연결 관계를 설명할 수 있었다.
연구팀의 가설은 필사본의 제작 목적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영향을 줬다. 한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집필한 암호문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작성한 기록을 모아놓은 것일 수 있어서다. 리사 페이긴 데이비스 박사는 선행연구에서 보이니치 필사본에 필사자가 최대 5명 참여했다고 추측한 바 있다.
필사본의 내용이 여성들의 의학 및 생활 지식과 관련됐을 가능성도 다시 주목됐다. 호주 맥쿼리대학교 연구팀은 보이니치 필사본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그림을 중세 의학 문헌과 비교한 2024년 조사 보고서에서 성의학 지식이 암호화됐다고 언급했다. 당시 연구팀은 15세기 독일 의사 요하네스 하틀립을 저자 후보로 지목했다.
이번 연구에서도 필사본이 여성의 신체와 생활에 관한 지식을 세대에 걸쳐 전달하기 위한 기록물이었을 가능성이 언급됐다. 다만 두 연구 모두 필사본의 실제 내용을 해독한 것은 아니며, 저자와 제작 목적 역시 확정되지 않았다.
600년 동안 풀리지 않은 보이니치 필사본의 수수께끼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다만 이번 연구는 그 비밀을 풀기 위해 글자뿐 아니라 페이지를 배열한 방식부터 다시 살펴야 한다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김한별 기자 khstar@sputnik.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