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년 베수비오 화산 분화로 닥친 폼페이 최후의 날, 주민들은 생각보다 많이 살아남았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당시 사람들이 과연 어떤 것을 챙겨 피난했는지 정보도 일부 밝혀져 시선이 모였다.
미국 마이애미대학교 역사학자 스티븐 턱 교수 연구팀은 베수비오 분화 당시 사람들의 탈출 상황을 최대한 과학적으로 분석한 결과를 29일 발표했다. 해당 내용은 스티븐 교수의 저서 ‘폼페이 탈출(Escape from Pompeii)’에도 담겼다.
이탈리아 남부 베수비오 산의 분화로 고대 도시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은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었다. 두 도시는 대량의 화산쇄설류(화쇄류)와 화산재에 파묻혔고 수많은 주민이 희생됐다.
연구팀은 폼페이 최후의 날이 끔찍한 재난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당시 살아남은 사람들이 적지 않았고, 이들은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을 챙겨 필사적으로 달아났다고 결론 내렸다.
스티븐 교수는 “원래대로라면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 유적에 남아야 할 유물이 사라진 것들이 많다”며 “예컨대 말이나 마차, 선박, 귀중품이나 일용품 일부가 보이지 않는데, 이는 사람들이 필요한 것만 골라 가족과 급히 피난한 증거”라고 설명했다.
이어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 주민들이 어디로 향했고 어떻게 생활했는지 고찰하는 것은 자연재해에도 살아남은 이들의 역사를 추적하는 작업”이라며 “화산 분화로 두 지역이 입은 피해나 재난의 양상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덧붙였다.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 유적에는 가구와 식기, 조각상, 의복 등 2000년 전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는 유물이 존재한다. 다만 말이 머물던 마구간에 말뼈가 없고 항구에 댔을 배들도 일부 자취를 감췄다. 금고 내용물과 귀중품, 조리기구 등 일상생활에 필수적인 도구도 없는 집이 많다. 때문에 학자들은 피난이 가능한 사람들이 이를 갖고 탈출했다고 여겼다.
스티븐 교수는 “현대 화산학 분석에 따르면, 베수비오 산의 분화는 약 18시간 동안 간헐적으로 지속됐고, 화산재가 내려 쌓이다가 치명적인 화쇄류가 덮친 것은 분화 종반부”라고 전했다.
그는 “즉 분화 직후에 행동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도망칠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며 “폼페이 최후의 날 마침 인근 지역에서 시장이 열렸을 가능성이 있다. 적지 않은 주민들이 마을 밖으로 나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여러 요인이 겹치면서 화쇄류에 휘말리기 전 대피할 수 있었던 주민들은 생각보다 많았다고 연구팀은 봤다. 피난 가능한 이들은 마차 등 이동수단을 가진 특권층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연구팀은 실제로 마을을 떠난 이들은 다양한 계층인 점을 알아냈다.
스티븐 교수는 “기록과 비문, 이름 분석 등을 통해 도망친 이들 중 여성과 자녀를 포함한 가족, 상인과 노동자가 포함된 점을 파악했다”며 “우리 연구에서 실명이 특정된 생존자만 172명으로, 그들의 가족을 포함하면 적어도 약 3000명이 살아남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연구팀은 피난민들이 국경을 넘어 장거리 피난을 하지는 않았다는 입장이다. 바다를 접한 나폴리 북부의 여러 지역에서 생존자들의 흔적이 나왔기 때문이다. 일부는 폼페이에서 제법 먼 로마 근교의 항구 도시 오스티아까지 갔지만 극소수였다.
아울러 연구팀은 당시 탈출과 이주, 정착이 전적으로 주민들 의지대로 이뤄졌지만, 로마제국 정부가 아주 무관심하지는 않았다고 전했다. 재해 발생 시 주민을 대피하게 하고 재난지원금을 지급하는 제도를 기재한 문서를 근거로 들었다.
스티븐 교수는 “국가의 지원이나 개인의 노력으로 이주한 이들 일부는 전보다 부를 쌓기도 했다”며 “푸테올리로 이주한 액젓 상인 일가는 같은 생업에 종사해 부자가 된 일이 비문과 기록에서 확인됐다”고 말했다.
그는 “폼페이 하면 화쇄류가 삼킨 죽음의 도시 이미지가 강하지만 살아남은 이들이 대단한 생명력을 보여준 것은 분명하다”며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이재민들의 기록은 당시 상황에 대한 명확한 정보를 후대에 전해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정이안 기자 anglee@sputnik.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