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염수리의 둥지 안에서 14세기 인간이 사용한 물건이 대량으로 발견됐다. 학자들은 이 천연 타임캡슐이 인류의 진화사에 얽힌 의문을 적잖게 풀 가능성을 제기했다.

스페인 그라나다대학교 생태학 연구팀은 14일 이런 내용을 담은 조사 보고서를 공개했다. 이번 연구 성과는 지난달 중순 발간된 국제 생태학술지 이콜로지(Ecology)에 먼저 소개됐다.

조류는 인간의 도구나 쓰레기를 물고 보금자리로 돌아가 둥지를 만든다. 맹금류인 독수리도 예외가 아닌데, 이중에서도 수염수리는 세대를 초월해 둥지를 계승하는 독특한 습성을 가졌다.

준멸종 위기종으로 지정된 수염수리 <사진=그라나다대학교·이콜로지 공식 홈페이지>

스페인 남부를 중심으로 야생 수염수리의 생태 조사에 나선 연구팀은 유기된 둥지 12개를 찾아 자세히 관찰했다. 이 과정에서 무려 인간이 만든 유물 226점이 확인됐다.

그라나다대 안토니 마르갈리다 교수는 "해당 지역에서는 수염수리가 70~130년 전 국소적으로 멸종했다고 여겨졌고, 이들이 후대에 물려주던 둥지들은 죄다 방치된 상태였다"며 "커다란 둥지에서 나온 물건은 총 2483점이며 약 9.1%가 인간들의 유물이었다"고 말했다.

연구팀에 따르면, 여기에는 천 129장, 가죽 72장과 나무로 된 창 및 화살촉, 마구, 바구니 파편, 밧줄이 포함됐다. 에스파르토(스페인 남부의 벼과 야생초)로 짠 650~750년 전 샌들도 나왔다. 에스파르토 샌들은 중세 스페인 농민이 일상적으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붉게 채색한 양가죽 조각은 선인들의 천연 염색 기술을 보여준다.

스페인 남부 절벽 및 동굴에 자리한 수염수리 둥지 12개 발굴 조사에서 확인된 인간 유래의 유물. 천이나 가죽 조각, 에스파르토 샌들 등이 나왔다. <사진=그라나다대학교·이콜로지 공식 홈페이지>

마르갈리다 교수는 "이번 발견은 수염수리의 생태학적 정보는 물론 14세기 스페인 남부 정착민의 역사·인류학적 자료도 얻게 해줬다"며 "세대를 넘어 보존되는 수염수리의 둥지가 천연 타임캡슐 역할을 한 셈"이라고 전했다.

수염수리는 유라시아대륙에서 아프리카대륙에 걸쳐 서식한다. 성체의 몸길이는 95~125㎝다. 날개를 다 펼친 길이는 최대 3m에 달하고, 체중은 5㎏에 육박하는 대형 맹금류다. 특이하게 뼈를 섭취하는 새로, 먹이의 80~90%는 죽은 동물의 뼈나 골수다.

마르갈리다 교수는 "수염수리는 다른 포식자가 먹다 남은 뼈를 물고 상공으로 날아오른 뒤 바위에 떨어뜨린다"며 "깨진 뼈에서 골수를 섭취하는 아주 독특한 식성을 가졌다"고 설명했다.

대를 이어 둥지를 물려주는 수염수리. 물고 온 물건들이 오랜 세월 퇴적층을 이룬다. <사진=그라나다대학교·이콜로지 공식 홈페이지>

이어 "동굴 내부나 깎아지른 암벽에 둥지를 트는 수염수리는 기본적으로 일부일처제"라며 "여러 세대에 걸쳐 재사용하는 둥지에는 집 짓기에 사용한 재료가 오랜 세월 퇴적돼 두꺼운 층을 이룬다"고 덧붙였다.

과거 남유럽 산악지대에 많이 서식한 수염수리는 19~20세기에 걸쳐 상당수가 자취를 감췄다. 사람들이 가축을 지키기 위해 독극물을 쓴 영향이 컸다. 현대에 들어서는 풍력발전기를 들이받는 개체도 많았다. 세계적으로 성숙한 개체가 최대 6000마리로 추측되는 수염수리는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이 준멸종 위기종으로 지정했다.

정이안 기자 anglee@sputnik.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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